심야식당 - 서울편
* 서점에서 심야식당 9권이 발간된 걸 보고 즐거운 마음에 써본 글. 펜픽이라고 할까 ;)
바람 소리와 함께 찬 공기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잡지에서 눈을 떼고 문쪽을 보니 한 여성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코트에 목도리를 칭칭 감은 여자는 고개를 꾸벅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나도 소리 없이 고개를 꾸벅했다.
벽에는 단출하게 적힌 메뉴, 작은 텔레비전, 시계, 옷걸이가 전부였지만 여자는 박물관이라도 온 듯 천천히 둘러봤다. 음소거를 해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자 앞에 따듯한 보리차를 놓았다. 여자는 또 소리 없이 고개만 꾸벅이고는 컵을 두 손으로 쥐고는 손을 녹였다. 컵 안에 뭐가 보이는지 고개를 숙이고 컵 속만 쳐다봤다. “밖이 많이 춥죠?”나 “컵에 뭐라도 들었어요?” 등의 말을 걸었다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는 하릴없이 다시 의자에 앉아서 읽던 잡지를 폈다. 식당 안은 다시 조용해지고 보리차 끓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저…” 여자가 적막을 깨고 말을 했다.
“잡채 주세요.”
나는 잡지를 선반에 두고 일어나서 대답했다.
“그건 좀…”
“안 되나요?”
“죄송하지만 그건 안 돼요.”
“…왜요?”
“그게… 할 줄을 몰라요.”
“아….”
여자는 다시 컵을 바라봤고, 나는 누구라도 문을 열고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심야식당] - 서울편
하루가 끝나고 사람들이 귀가길을 서두를 때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시래기국 정식, 맥주, 청주 소주. 메뉴는 이것뿐. 나머지는 마음대로 주문해서 가능하다면 만들어 주는 게 나의 영업방침이지. 영업시간은 밤 12시부터 아침 7시경 까지. 사람들은 심야식당이라 부른다. 손님이 오느냐고? 그게 꽤 온단 말이지.
[짜파게티]
“짜파게티 주세요.”
요즘 들어 매일같이 오는 이 남자는 작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닌다고 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또요? 매일 짜파게티만 먹네요.”
“네 뭐…”
“일요일도 아닌데…”
내 농담을 못들은 건지, 못들은 체하는 건지 남자는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짜파게티는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며느리도 모르는 특별한 비법 같은 것도 없다. 그저 포장지 뒷면에 써진 조리예대로 따라 하면 그뿐이다. 아무래도 식당이다 보니 집에서 먹는 거처럼 냄비째 주지 않고 적당한 그릇에 담아준다. 그 위에 채 썬 오이를 얹고, 깨를 조금 뿌리면 완성.
주방에서 냄비를 씻고 나오니 남자는 그릇을 거의 다 비운 상태였다. 문이 열리고 슈퍼집 주인이 술에 조금 취한 채 들어왔다. 식당에 손님은 남자 하나였고, 슈퍼집 주인은 자연스레 짜파게티가 담긴 그릇을 보고는 말했다.
“나도 짜파게티 하나.”
“일요일도 아닌데…”
난 다시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슈퍼집 주인은 못들은 건지 내 말에 맞장구를 치지 않고, 의자에 앉으며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또 짜파게티야? 질리지도 않아?”
“맛있어서요.”
“그런데 맛있는 거 먹는 사람이 표정이 별로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 아니에요. 별로.”
“뭐… 그렇군. 주인, 여기 맥주부터 한 병 줘.”
슈퍼 주인의 관심은 금세 술로 옮겨갔고, 남자는 평소와 다르게 맥주도 한 잔 시켜서 마시고는 돌아갔다.
그리고 이틀 뒤, 남자가 평소에 오던 시간보다 더 늦게 술에 취해서 나타났다. 이번에는 다른 걸 시킬 줄 알았지만 또 짜파게티를 시켰다. 잘 먹지 못하고 있는 남자에게 보리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말수가 없던 남자는 보리차를 다 비우고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횡설수설 얘기를 시작했다.
여자친구가 집에 있을 때면 짜파게티를 자주 해줬다고. 요리를 못 하는 여자친구는 그래도 오이를 올려놓음으로써 이것도 요리라며 말했다고 한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고. 며칠 전에 여자친구에게 시간을 갖자는 말을 들었다고. 사실 조금씩 권태를 느껴서 지금 이거처럼 식은 짜파게티 같은 관계였다고. 그래서 시간을 갖자는 말에도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요즘 들어 많이 그립다고, 시간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남자의 그날 밤 얘기를 정리하면 이랬다. 마침 손님이 없어서 나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근처에서 조용히 땅콩을 까던 이씨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세상 일은… 뜻대로 안 되는 법이야…. 인생 우습게 보지 마.”
나는 못 들은 척했고, 남자는 이미 고개를 테이블에 숙이고 잠이 든 거 같았다. 술집도 아닌데 왜 이렇게 주정뱅이가 많은 걸까 생각하며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하나 꺼냈다.
두부 부침을 먹던 슈퍼집 주인이 심심했던지 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말을 걸었다.
“그.. 왜 맨날 짜파게티만 먹던 친구 있잖아. 그 친구 요즘에는 안 오는 거 같네?”
“음…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통 오질 않는군요.”
“그 친구 직접 끓여 먹는 거 같더라고. 한 달 전쯤에는 종종 우리 가게에서 어느 처녀랑 같이 와서는 짜파게티를 사가더라고.”
나는 잠자코 행주질을 하고 있었다. 슈퍼 주인은 계속 말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해먹는 게 싸긴 하지… 나는 그래도 여기서 먹는 게 괜찮더라고. 오이도 올라가 있고 하하.”
“짜파게티 한 그릇 드릴까요?”
“됐어~ 배불러. 그런데 그 친구 최근에는 짜파게티도 안 사고 생수만 사가더라고. 꾀죄죄한 꼴로 말이야. 뭔 일이 있는 건지…”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지겨워질 때가 있는 거죠.”
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그가 취해서 왔던 날을 떠올리며 행주질을 계속했다.
그 뒤로도 한 참을 안 오던 남자가 다시 찾은 것은 계절이 바뀔 즈음이었다.
“짜파게티 주세요.”
짜파게티가 담긴 그릇을 남자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또 짜파게티네요… 잘 지내요?”
“네, 뭐 그럭저럭요.”
나는 의아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또 짜파게티를…?”
“오늘 찬장 구석에서 짜파게티를 봤거든요. 그런데… 집에 오이가 없더라구요.”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미소만 지은 채 주방으로 돌아섰다. 남자는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고 돌아갔다. 그 이후로도 종종 오지만 더는 짜파게티를 시키지 않는다. 언젠가 물었더니 요즘 만나는 여자친구가 인스턴트 음식을 싫어한다고 하더군.